지난번에 큰 아이가 집에 왔었을 때 친한 선생님에게 선물로 꽃게장 선물을 받았었다. 큰 아이와 남편이 맛을 보더니 “명품 간장 게장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맛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간도 적당하고 살도 많다” 며 먹으면서 정말 행복해했었다. 이번에 작은 아이가 온다고 하여 미리 주문을 하였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맛있어하는지 정말 감사하다. 토요일에 도착했는데 벌써 두통째 헐었고 거의 남지 않았다. 아이들이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는 행복함을 아무나 누릴 수 없단다. 사실 나는 게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나의 편견을 확 깨어 준 계기가 되었다. 게장국물이 아까워 두부를 살짝 구워 찍어 먹었고 반숙으로 삶은 달걀도 함께 먹으니 정말 좋았다. 최대한 빨리 먹어야 맛이 있다고 오늘과 내일 안에 다 먹으라고 권해 주셨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게살의 싱싱함이 그대로 살아 있고 간장의 짠맛이 너무 깊이 스며들기 전에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둘이서만 한적하게 지내다가 아이들이 오니 아이들의 생활리듬에 맞추어 밤낮없이 펄펄 살아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온 첫날부터 꼬박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작은 아이가 갔었을 때 이층에 올라가 보니 내가 아버지께만 집중하느라 아이에게 너무 무심했었던 것 같아 아이를 보내 놓고 이층 아이방에서 나 혼자 엉엉 소리 내어 울었었다. 춥지 않고 아늑하게 재우고 싶은 마음에 아이를 위해 이불홑청을 꿰매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잠을 못 잤다고 남편이 오늘 아침에도 밥을 하고 두부조림을 만들어 스스로를 챙겼기에 늦게 일어난 내가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는 것이 쉬웠다. 물론 간장게장 덕분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일은 큰 아이의 생일이어서 어머님을 초대하였더니 또 마음이 바쁘다. 단시간에 할 수 없는 음식들을 미리 만들어 두기 위해서다. 미역국을 올려 두었고 리코타 치즈샐러드에 넣어 줄 생아몬드도 구워두었다. 또 잡채에 들어갈 시금치를 미리 데쳐 놓았고 우유로 요구르트와 리코타치즈를 만들었다. 아침초대를 하면 전날밤은 꼬박 지새우게 된다.
아이들이 있는 동안 함께 할 시간과 음식을 관리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마음만은 편하고 또 감사하다. 물론 아이들이 처음 집을 떠날 때 가졌었던 헤어짐으로 인한 슬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들의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기에 응원을 하는 마음이 내게는 더 큰 것 같다. 오히려 아이들이 긴 여행을 앞두고 있고 이전과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펼쳐지는 두려움 때문인지 힘든 마음이 더 큰 것 같아 보인다. 큰 아이는 '엄마는 우리와의 이별을 별로 섭섭해하지 않는 것 같다"며 살짝 서운해하였다. 눈물을 뿌려가며 이별하고 싶지 않아 담대함으로 가장을 한 것뿐인데 아이들은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내게 맡겨진 교회의 일이 너무 커서 때로 아이들이나 가족보다 더 최우선이었었던 적이 많았었다. 이렇게 나이가 들고 나니 가장 귀한 것이 가족인데 싶어 아직도 내 안에 늘 미안한 마음이 크다. 어쩜 내게는 맡겨진 일이 왜 그렇게도 많았는지 싶어지곤 한다. 더 이상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늘 하곤 한다.
엄마도 큰 언니와 남동생을 미국으로 떠나보냈었는데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셨겠구나!’ 싶어 진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난다. 동병상련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한 것 같다. 망망대해에 떠밀려 가는 배와 같은 그런 불안함과 희망 섞인 기대감과 감사들이 얼버무려져 있는 양가적이고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이 불빛처럼 또 물결처럼 늘 일렁거린다.
내가 더 많이 늙어졌을 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과 다시 만났을 때 여전히 조심스러우면서도 편안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연로하셨음에도 우리 부모님은 참 세련되셨던 부분이 많았었구나!’ 싶어지곤 한다. 지나고 보니 나름 참 많이 조심하셨었는데 자식 된 나는 이해해주지 못했었음을 깨닫는다. 당신들의 최선이 지금의 나의 삶을 영위하게 이끄셨던 것인데 나는 늘 부족하다고 투정을 하였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감사함 투성이었다.
오늘 예배 때 목사님의 말씀과 오후성경공부 내용이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우리 부부는 어제부터 큰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했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만 데리고 변화산과 겟세마네에 가셨는지? 요한복음의 결론은 무엇일까?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뜬금없게도 야곱에게 마음이 쓰였다. 야곱은 제자 중의 첫 순교자였기에 준비가 필요했어서 그곳에 데리고 가셨을 것 같다 “고 하니 둘 다 인정한단다.
최근에 들어서야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외쳤던 요한의 고백이 마음깊이 박혀온다. 그 감정을 갖게 된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우리의 부모님이셨음을 깨닫는다. 아이들이 기쁨으로 우리를 떠나 힘차게 가는 길을 기대함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내 삶의 새로운 원동력이 됨을 느끼기에 참 감사하다. 큰 언니와 남동생이 우리 부모님을 참 기쁘게 하였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아낌없이 주었던 그 나무처럼 또 사도요한처럼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밤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쪼개어 족집게처럼 알려주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느끼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 중요한 시점인 것 같다.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