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밑반찬을 만들지 않는 편이다.
멸치볶음 조차도 두스푼 정도만 만들어 두끼 이상을 먹지 않도록 만들곤 한다.
넉넉히 많이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는 아까워 나혼자만 먹어야만 하는 고충이 싫어서이다.
한번도 반찬을 만들어 가지 않았었던 큰아이가 이젠 일년가까이 외지에서 살다보니
지혜가 생긴 것 같다.
집밥에 사람들이 목숨을 거는 것이 이상해 보였었는데 이젠 이해가 된단다.
"집에서 만들어 주는 밥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하면서 말이다.
지난번에 연잎쌈밥을 보내주었고 언니가 만들어 준 반찬을 가져가서 밥을 사먹지 않으니
돈도 절약되고 속도 든든하다며 또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최후의 순간에 만들어야 오래갈 것 같아 미리장을 보아두었다가 토요일 저녁때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
딸 아이가 도와주었는데도 멸치를 다듬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새벽 두시까지 만들어야만 했다.
엄마가 만들어 준 심심한 그 맛이 늘 그립단다.
쇠고기 달걀장조림,조미오징어채볶음,멸치볶음,명태포조림,포크커틀릿을 만들었다.
조미 오징어채를 깨끗이 씻어서 살짝 쪄 주었는데 졸지에 다듬은 멸치며 명태포도 함께 쪘다.
양념장을 끓여서 따로 따로 무쳐낸 후 팬에 포도씨유를 두른 후 볶아주었다.
더 오래 풍미가 유지 되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포크커틀릿은 안심부위의 고기를 사두었다가 얇게 져며 내어 간을 하고 튀김옷을 입힌 다음
튀겨낸 후 한 김 식혀 낸 다음 냉동실에 넣어 얼려두었다가 출발 하기전에 꺼내어 가져갔다.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조리도구는 전저레인지이니
잠깐 시간을 내어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완제품을 만들어 주어야만했다.
무채를 볶아서 만들어 달란단다.
모던밥집에서 나오는 무채볶음처럼 말이다.
아침에 그것도 만들어 주었고 섬시루에 부탁하여 얼려두었던 연잎밥도 보내주었다.
'다음에는 어떤 마른 반찬을 만들어 주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벌써부터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서 유명한 밑반찬인 노가리조림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처음이곳에 와서 얼마안된 겨울 이었었다.
다른 교회 학생회 수련회를 도우러 갔었다.
부모님들이 만들어 보내주셨던 밑반찬인 노가리 조림이 정말 맛이있었다.
우리 엄마는 애기명태를 방망이로 때려 부드럽게 만든 후
고추장 양념장을 발라 늘 구워주시곤 했었다.
조림을 만들어 주시지는 않았었다.
그 때 처음 먹어보면서 '항구가 집이었던 사람들의 가장 좋아하는 밑반찬이구나!' 싶었었다.
한 번 먹어 본 음식인데도 내 머릿속에 이렇게 각인되는 것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18년 동안 부모곁에서, 이 곳에서 생활했었는데
일 년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니 스스로 너무 힘이 들었었단다.
따뜻하게 데워진 이불 속에 누으면서 "잠 잘때 춥지는 않니?" 하고 물었더니
옆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따뜻한 이불에 들어와 누울때면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나곤 했었던
작년이, 지금 우리가 자고 있었던 이 방이, 그 시절이 그리워지곤 했었단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긴 했어도 일정한 일과가
정해져 그것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편했었던 것 같단다.
처음에는 홍수처럼 갑자기 밀려온 자유를 어찌 할지 몰라 정말 당황스러웠단다.
문화적 충격을 가장 심하게 겪은 사람이 자신인 것만 같았단다.
방종으로 흐를 수 도 있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게도 되었단다.
18년동안 쌓아 왔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림을 경험해야만 했었던
힘듦을 다 말하진 않았었지만
나름대로 주안에서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들어 살고 있었으리라!
처음에 유치원 보냈었을때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울어서 한달동안
나를 힘들게 만들었었던 때가 생각이 났다.
큰아이는 유난하게도 모든 과정 과정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어 했었다.
하지만 힘들어 했었던 것 만큼 차츰 차츰 누구보다 더 잘 적응해 갔었다.
고등학교때에도 공부하는 것을 스스로 해야만 했었던 것 처럼
인생은 역시 어찌 보면 철저히 혼자임을 깨달았으리라.
스스로 시간을 정하고 그 정함대로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으리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 어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었을 아이를 생각하니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또 나름대로 즐거움의 순간들이었으리라 짐작되어졌다.
추수감사절이어서 새벽예배 후에
점심 식사준비를 같이 하기로 하였어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었다.
짐이 너무 많아져 강릉까지 태워주려고 하는데 남편이 잠을 자지 못했으니
사고 난다며 같이 바래다 주겠다고
하였다.
차안에서 지금까지 잘 살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너와 동생에게도 감사한다고 고백해주었다.
집에만 오면 학교로 가기위해 차를 타고 가야하는 힘듦이 싫어져 떠나기 싫은데
가면 또 열심히 살게되곤 한단다.
또 학교에만 가면 집에 오기가 싫어 진단다.
남편이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늘 물가에 내 놓은 간난아이같기만 하다.
하지만 잘 헤쳐나가기를 바라고 믿으며 기도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믿음안에서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젠 나보다 더 큰 믿음으로 주 앞에 서게 될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잘 도착하여 밥도 맛있게 먹었다는 통화를 하고 나니 맥이 풀린다.
이렇게 늘 노심초사하는 부모들의 염려와 기도를 안고 살아왔을 나를 바라보며
또 나의 염려와 기도를 먹고 자라는 아이를 바라본다.
인생은 그렇게 세대를 흘러 왔었고 또 이렇게 흘러 가는 것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