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의 글

Gloomy 기숙사

걸상 2009. 12. 19. 08:39

딸아이가 자신의 국어과지에 쓴 글이다.

허락을 받아 글을 올려본다.

늘 궁금해 했던 학교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1.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간다. 나의 오른손에는 오전에 썼던 미술도구, 왼손에는 체육복이 담긴 가방이 들려있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간다. 앗 흙바닥에 구두굽이 끼었다. 구두굽을 빼내며 동시에 굽이 까진 정도를 확인한다. '지난번 실습 때 신고 처음 신는 구두인데 이렇게 까지면 속상해서 어쩌라는 거야'혼자 생각한다. 이 기숙사 계단은 1년 내내 오르내려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때쯤 되면 쉬지 않고 한 번에 올라갈 때도 되었는데, 꼭 중간에 한 번쯤 쉬어 줘야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나의 저질체력을 탓해 본다. 어렸을 때에 운동 좀 해둘걸.  지하 1층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까지 간다. 그나마 엘리베이터라도 탈 수 있어 다행이다. '내 저질체력에 4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으면 아마 졸도했을지도 몰라' 그 일을 상상해 보니 고개기 저어진다. 방문을 따고 들어간다. 이불 위에 겉옷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노트북을 켜고 네이트온을 킨다. 몇 시간 만에 몹쓸 구두에서 벗어난 발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엄지발가락부터 서서히 움직이며 부은 발의 부기를 빼려 노력한다. 다시는 구두를 신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내일이 되면 치마를 입는다느니 스키니를 입는 다느니 하면서 구두를 찾을 것이다. 2, 얼마 전 재수를 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대학생활이 궁금한 친구는 대학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한참 대화중 덧붙이는 한마디."이 놈의 지긋지긋한 집구석 언제쯤 떠나게 될까? 하루빨리 떠나고 싶다.ㅋㅋㅋㅋㅋㅋ"하하하. 나도 2월달엔 하루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어.

 

3. 우리 어머니는 하루에 방문자 200명이나 되는 블로그의 운영자시다. 가끔씩  집이 그리울 때면 엄마의 블로그에 들어간다. 앗, 오늘도 새 글이 올라왔구나.'오늘은 베이킹 클래식에서 롤케이크을 만들었다.퇴근한 남편과 학교끝나고 집에온 아들과 맛있게 먹었다.중간에 발라져 있는 핸드메이드 딸기쨈이 일품!'나는 사감선생님 몰래 데워 온 햇반과 참치 캔을 몰래 뜯으며 그 글을 읽는다. 조그마하고 오래된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그 조잡한 사진에서도 엄마가 직접 구은 롤케익 한 조각의 미칠듯한 폭신함이 느껴진다. 집에 있을 땐 별식이었던 돈가스, 알밥, 김치등뼈찜이 지금은 말만 들어도 물린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맛보게 되는 계란 프라이 한 접시에 입맛을 다시며 달려든다. 조미료를 한 스푼씩 듬뿍 넣은 음식보다 식용유, 계란 한 개, 소금 약간 들어간 순결한 계란 프라이가 더 좋아졌다. 계란 프라이에서 집밥의 순결한 맛을 조금, 아주 조금 느낄 수 있나 보다.

 

4. 아프다. 어젯밤에 목이 따끔따끔하더니 결국 감기에 걸려버렸다. 서울에 사는 룸메이트는 주말이라 집에 가버리고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 혼자 누워있다. 방은 건조하고 목은 마른데 일어나 몇 미터 걸어가 물을 떠 올 힘조차 없다. 몹쓸 자존심에 동기들을 찾아가 "나 아파" 하며 징징대지도 못하겠으니 그냥 홀로 쓸쓸히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하며 누웠다. 누워 생각한다. 사람의 온기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홀로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다시 잠이 든다. 그날 밤 나의 무의식의 단초에서 나는 답신 없는  sos를 치고 있었다.

 

어제 아이의 짐을 같이 풀어 정리하면서 꼼꼼하게 짐을 챙겨 온 아이가 기특하였다. 기숙사에서 짐을 완전히 빼야만  하기에 8개나 되는 택배를 받으면서 '짐을 싸느라 고생했겠구나' 싶어졌다. 스스로를 관리하면서 아이는 그렇게 홀로서기를 당당하게 익혀가리라. 결국 부모는 아이의 홀로서기를 돕는 자임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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