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 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나 살았던 큰 아이의 짐이 내려왔다. 이사를 해주시는 분이 아들에게 신선한 회를 사 준다며 꼬셔서 데리고 오셨단다.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정말 세상 부러웠다. 아빠의 힘든 일을 노는 날이라고 따라와 준 아들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게 여겨졌다. 열정적으로 아빠를 도와주는 모습이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여겨져 나도 모르게 꿀물을 타서 주었다. “부럽다”라고 말하며 아드님에게 불가리스를 두 개나 주었다. 무리 없이 짐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는 아빠와 아빠를 무작정 도우려고 오버하여 짐을 나르려는 부자사이가 정말 멋져 보였다. 그 모습에 반해 큰 아이는 보내면서 남편은 받으면서 팁을 얹어 드렸다. 장거리를 한 번씩 다녀올 때 도와주면 아이에게 십만 원씩 주신단다. 아빠와 아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짐이 얼마나 많은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정신이 없는데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곧장 떠날 수도 있었는데 한 달 정도 우리 곁에 있어 준다고 하니 그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짐을 정리하는 일보다도 서로 못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장성한 자녀를 만나는 것은 부모 됨을 포함하여 인간됨이 성장하는 것임을 알기에 또 감사했다. 타인을 만날 때 성숙되어 가는 나를 바라보게 되면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자녀여서 참 고맙다.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 앞에서 우리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며 그 길을 열어 간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교인과 목회자가 함께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된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지난번 작은 아이와도 함께 이야기를 하며 정말 즐거웠었다. 큰 아이와 부둥켜안으면서도 “이젠 거꾸로 뒤바뀌었다”며 막 웃었다. 껴안을 때 우리가 아이에게 더 많이 기대는 것 같아 보여서다. 아이들로 인해 누리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규정하기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라고 늘 표현하곤 한다. 그럼에도 타국에서 살아가려는 자녀들을 볼 때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분명 스스로 살아가야 할 앞날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불안함이 클 것이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지혜도 깨달아 갈 것이다.
신혼 침대를 우리에게 맡겨 놓고 가게 되었는데 얼마나 좋은지 덕분에 예정에도 없었던 호사를 누리게 되어 참 감사했다. 작년 가을부터 남편은 나에게 “새 폰을 구입하라”라고 했었는데 최소한 어느 정도는 써야 한다는 나의 계산으로 미루어 왔었다. 큰 아이가 당장 인터넷으로 구입해 주어 고마웠다. 소소한 꿀팁을 가진 소도구들을 설명하며 가져다준 것들이 얼마나 신박했는지 모른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해가 나면 해가 나서 감사하다는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계획을 해도 주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 하심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실수조차도 은혜로 바꾸시는 섭리를 알기에 느긋해지고 기뻐하게 됨을 깨닫는다. 사실 큰 아이가 결혼을 하고 난 후 워낙 바빠서 또 거리가 멀어서 서로 안부를 물어볼 정도였어서 소원해진 느낌이 없지 않았었다. 그냥 계획대로 떠났다면 친밀함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떠났을 것만 같았다. 물론 엄마와 딸인 관계가 어디로 숨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난 몇 주동안 함께 있게 된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큰 아이가 가지고 온 석사 논문의 머릿 글을 함께 읽으며 감탄할 수 있어서 또 행복했다. 서로를 주 안에서 인정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것임을 알기에 나이 먹는다는 것이 참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