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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물가 풍경 무늬병

걸상 2021. 10. 21. 18:19



강릉 고려 청자 전시회에서 너무 아름다운 청자를 보았어서 사진을 올려 본다. 너무 예뻐 그림을 그려 보려고 그리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손잡이와 밑으로 흐르는 둥근 부분이 인체 공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으로 잡았을때 그립감이 정말 좋을 것만 같아보인다. 또 플라스크와 다르게 윗부분에서 묵직한 아랫 부분으로 흘러 내려가는 부분이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눈물 모양 같기도 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것이 허리라인이나 여인의 고운 목선같기도 한 것이 사람의 인체를 닮은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청자에 그려진 그림이 인상적이다. 갈대를 아치처럼 그렸고 그 아래 두 마리의 새가 다정스럽게 또 아치를 그리고 있다. 병의 밑에 겹으로 아치가 새겨진 둥그런 무늬가 병밑으로 돌아가며 연속해서 그려져 있는데 그 위에 새를 그려 넣은 것도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어 준다. 마치 바위나 돌같기도 하고 물을 표현 한 것 같기도 하다. 윗 부분의 높이 솟은 구름이나 병을 삥 둘러 돌아가면서 연속적으로 같은 모양을 그린 그림들도 그릇 자체를 더 완벽해 보이게 만들어 주어 정말 매력적이다. 같은 그림이라고 생각 했었는데 반대편의 그림에는 한쌍의 새들의 모습이 다르게 그려져 있어 또 흥미롭다. 무언가 스토리가 연결 되어 있는 것 같아 작가에게 물어 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다. 갈대의 털도 얼마나 디테일한지 정말 놀랍다. 도화지에 그린 것도 아니고 물감으로 그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뒷 부분도 볼 수 있게 앞뒤가 다 보이는 공간에 전시를 해 주어 정말 감사했다. 그림에 여백미도 있어서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김병욱선생님께 그 당시에는 그림을 그린이와 도자기를 만든 사람이 다른지 여쭈니 아마도 같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고 했다. 도자기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세계로 깊숙히 끌려 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다. 명화란 남녀 노소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그림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청자가 그런 도자기임에 틀림없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멋지게 보이기 위한 사기성이 보인다”고 내가 말했더니 우리 카페에 오셨던 한 미술 선생님이 피카소도 “그림이란 진실을 이야기 하는 거짓말”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병은 벌거벗은 사람처럼 가식 없이 그냥 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매료되는 것 같다. 외국에 가 있는 큰 언니와 가까운 지인들에게 “ 강릉 청자 전시회에 갔었다”며 카톡으로 이 병의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하나같이 “정말 아름답다”고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색감이 주는 신비함과 모양이 주는 정교함과 오묘함, 그림이 주는 따뜻한 정감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생명력을 가진 완전체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라장의 연주를 실제 관람한 것 같은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들게 만들었다. 연주를 들으면서 오래 전에 쓰여진 곡의 아름다움과 머언 훗날 최고의 연주자의 완벽한 연주와 그 곡의 해석에 빠져 드는 것처럼 머언 옛날에 이 병을 만든 작가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묻고 싶어지는 밤이다. 분명 술을 담았을 것 같은데 얼마나 아껴서 사용했으면 12~13세기 정도의 것이 이렇게 잘 보존 되었나 싶어진다. 아마도 늘 바라보며 흐믓해 하며 사용했을 것만 같다. 씻을 때도 조심스럽게 다루었을것이다.

전시회에 가서 사진을 찍으며 내 폰에 저장하고 싶어 욕심껏 열심히 찍고 찍었다. 그런데 어떤 것은 분명 사진이 실제 병의 색감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해 사진을 계속찍었었다. 그런데 아무리 찍어도 그 색이 나오지 않아 너무 속상했다. 아이 폰이 스스로 포샵처리를 하여 색깔이 바꾸는 것 같아 던져 버리고 싶었었다. 카메라 사진으로 이 병의 원래 색을 담을 수 없는데 ‘언제 다시 이런 전시회를 또 볼 수 있겠나?’ 아쉬운 마음이 커졌던 순간이기도 했다. 할수만 있다면 전시회의 마지막 끝자락의 시간을 꽉 붙잡아 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