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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지옥

걸상 2020. 9. 17. 23:12

큰 아이에게 최근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며 “부부 ,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포함 나와 관련된 모든 관계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하니 사르트르 말이 맞는 말이란다. “무엇이라고 했는데?” 하니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단다. “그래 맞아!”하면서 아이와 같이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의 소설의 첫 문장이 생각 났다. 스스로 자신이 지독한 이기주의자임을 자각한 것을 소설 구토의 첫 문장을 통해 고백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의 나이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고백이 적나라하게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충격이었다. 내 뒷통수를 치는 듯한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여 잊혀지지 않는다. 정신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 내기도 힘든 젊은 날의 나를 기억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자녀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적에는 모든 관계의 중심이 부모였지만 커가면서 내가 가장 중요했고 결혼한 후는 부부 그리고 나의 가족이 자녀들이 모든 관계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구십이 넘은 우리 부모님을 보니 결국 인생은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타인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부모를 향한 나의 마음을 살펴 보면서 자녀들을 향해서도 독립하여 스스로 서도록 돕는 것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노년이 되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나를 관리 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아버지를 보면 늙은 육체에 갇혀 당신의 생각 만큼 움직이지도 듣지도 보지도 잡숫는 것도 못하시는 모습이 참 불쌍하다. 자유롭지 못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짐작만 할 뿐 가늠 할 수가 없다. 삶의 피폐를 절절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일상의 버거움을 빨리 해소하고 놓여나고 싶을 것만 같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지 못하는 현실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었던 요양원의 삶이 답습되지 않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 보지만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는다. 아버지 안에는 어린 아이의 약함, 아버지의 친근감, 어른이 가지는 엄위함, 노년의 억울함과 서러움, 고집스러움이 다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며느리가 시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감정이 섞이지 않아서 일 그 자체일 수 있지만, 친정 아버지는 감정을 다 주고 받으면서 같이 사는 것이어서 더 힘이 든다”는 박선생님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나를 향한 기대감이 있기에 또 섭섭함도 더 클 것이다. 다중인격을 소유한 것 같은 다양한 아버지의 얼굴로 인해 너무나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우리부부가 살면서 중점을 두는 일에도 아버지는 늘 객관화 시켜서 훈수를 두고 싶어 하신다. 가정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직선으로 줄세우고 싶어 하신다. 가족안에서의 관계를 말하면서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에 꽂히게 되다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가족이어서 또 친할수록 친하다는 이유로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옥 같다고 느끼지 못 할 것이다. 가족이라면 응당히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들이 거절 되었을 때의 좌절감을 아실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당신 방문을 열어 논 상태로 잠을 드신다. 안산언니가 주무시다가 죽게 될 것 같아 걱정이 되어 문을 열어 두고, 또 밤에도 잠을 못 자는 것일 수 있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기에 아버지의 행동의 기저를 읽을 수 없어서 내가 오늘도 아버지께 또 하나의 지옥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 된다. 우리 집에 있는 것이 요양원처럼 상처로 남지 않게 하려고 늘 신경을 쓰게 된다. 한 집에 살았지만 카페를 열기 위해 준비하는 아들 내외의 무관심으로 인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신 언니네 교회의 권사님의 이야기를 늘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다행이 우리 집에 남편과 아들이 같이 살아 주어 감사하고 두 부자의 아버지를 향한 애정이 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