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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형제

걸상 2020. 7. 3. 20:25

동생네가 가고 나니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마음이 생겨나는지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날씨도 세찬 바람과 함께 비가 내리고 마음과 몸은 천근 만근인 것 같은 날이었다. 아버지도 머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시는데 아마도 아빠도 내 마음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더 잘해 줄 걸”하는 회한과 “왜 그렇게 멀리 타국으로 가야만 하는지”하는 원망의 맘과 시원함과 섭섭함, 그리움등 설명 할 수 없는 여러가지 마음들이 뒤 엉키고 섞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나를 짓누르는 것 만 같았다. 그래도 일어나서 움직여야만 했다. 앞에 마주 오는 차가 내게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는데 배려를 한다는 것이 주차된 차를 긁고 말았다. ‘다정도 병’이라고 나 스스로를 자책해 보았지만 이미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카페에 와 보니 화요일인데도 꽃을 찾아 가지 않은 분이 계셔서 보건증을 찾으러 가는 길에 가져다 주려고 출발하여 갔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시간이 없어 보건증을 못 찾아 속상했지만 “간 김에 식재료라도 사자”고 나를 다독거리고 차를 돌렸는데 지갑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수업도 있었고 카페에 와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 날은 머피의 법칙이 적용되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얼마나 바람이 많이 부는지 “하루에 두번씩 교통사고를 내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여 돌아 와야만 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도 다 접고 앞으로의 당신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숙제 앞에서 강인해지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올케와 아버지의 변명이 쌍둥이를 보는 것 같아서 정말 신기했다. 봉사할때마다 간혹 느껴져 스스로 힘들어 했었던 것처럼 일은 실컷 하고도 존중감, 깊은 공감과 동지애도 못느끼게 되어 섭섭함이 넘치는 것처럼 아버지에게 나는 오로지 하나의 도구로 취급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도 아버지 딸인데 나의 옹색한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결국 나의 일이라고 다짐을 했음에도 그런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아 나 스스로 반성을 해야만 했다. “당신은 운전을 접어야 한다”는 남편의 질책도 달다고 느껴 질 정도이었다. 긍휼을 구하고 가난을 구하는 마음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필 전쟁때 자녀를 삶아 먹는 이야기를 목사님께서 설교해주셨다. TV 에서 6.25를 설명하면서 “전쟁은 자녀도 버리게 한다”는 이야기로 인해 충격을 먹고 있었던 때다. 부모라면 원산에서 피란해 올때 배에 탈 수 있는 있는 사람이 제한 되어 있다면 자녀를 태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열변을 토했던 김 선생님의 이야기도 오버랩이 되었다. 말씀앞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기준이 얼마나 세속에 물들어 있고 조잡하고 수시로 변하는지를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내가 매일 일상에서 지불해야만 하는 코스트에 대한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권위자로 부터의 인정의 욕구로 늘 목말라 했던 나 자신을 돌아 보았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으로 내가 컸고 그 사랑을 이제 아버지에게 돌려줄 수 있어야 하는 당위성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자각하며 기억하려 힘쓴다. ‘한가족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절대적 이었는가?’ 늘 묵상한다. 그렇게 묵상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관계의 끈이 얼마나 나약한지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바라기는 우리 아버님의 죽으심 앞에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하나로 뭉쳐 졌는지, 또 얼마나 은혜가 넘쳐 났는지 알기에 우리 부모님도 그때와 같기를 바라는 꿈을 동생네 부부에게 피력했었다. 허다한 허물을 서로 덮어 줄 수 있어야함을 말이다.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 성숙해져 가고 있다고 느낄때가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