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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손주
걸상
2021. 12. 17. 22:32
작은 아이가 통화중에 “할아버지는 건강하신지”를 물어왔다. 아이는 걱정이 되었나 보다. “네가 가고 나서 삼주 동안 정말 많이 힘들어 하셨다”고 하니 “어떡하냐?”며 걱정의 말이 늘어졌다. “다행이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다”고 하니 “이제 요양사님을 오게 하라”고 권해주었다. 아버지를 모셔 온 것이 아이에게 늘 미안하다고만 생각했었다. ‘아이도 아버지를 이렇게 많이 염려하고 있었는지’를 잘 몰랐었다.
아마도 아버지로 인해 힘들어 했던 우리 부부의 모습만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위하고 섬겨 주려고 했었던 것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감사했다. 큰 아이도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남자친구와 “나이들은 우리를 모시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해 줄 때도 ‘그냥 위로가 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느 누가 무엇이라 한다해도 가족들이 함께한 시간과 고생과 기본적으로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늘 효도가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하는 기본도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을 하곤 했었다. 일년 칠개월 동안 우리와 같이 살면서 설득되어진 것 같아 정말 고맙다. 아버지에게 작은 아이는 늘 계단을 오르내리며 들썩거렸던 터라 사람냄새를 풍기며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북적거리며 살게 될 날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사실 요양사의 도움을 받을때도 여행이나 잠깐의 외출을 하려고 하면 아버지의 세끼 식사를 챙겨 드리는 일이 나에게는 가장 큰 숙제였다. 작은 아이가 가고 나니 ‘아이가 있을 때는 항상 집에 있었기에 기대는 마음이 있었다. 새삼 아이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웠었는지’를 깨달았었다.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감사함과 미안한 마음이 감아가고 있는 실뭉치처럼 갈수록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사서 하는 고생이라”고 남들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순간 순간 “그래도 잘했다”는 생각이 늘 든다.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 갈 뿐이다. 커가는 어린 손주들과 같이 사는 것과는 달리 보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참 많이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 못된 생각인지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며 구원의 기쁨을 늘 묵상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믿음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괴리감이 있는지를 늘 깨닫게 되는 것 처럼 말이다. 코로나19와 아버지는 내 인생의 새로운 획을 긋는 전환점과도 같았다.
아마도 아버지로 인해 힘들어 했던 우리 부부의 모습만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위하고 섬겨 주려고 했었던 것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감사했다. 큰 아이도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남자친구와 “나이들은 우리를 모시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해 줄 때도 ‘그냥 위로가 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어느 누가 무엇이라 한다해도 가족들이 함께한 시간과 고생과 기본적으로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참 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늘 효도가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하는 기본도리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을 하곤 했었다. 일년 칠개월 동안 우리와 같이 살면서 설득되어진 것 같아 정말 고맙다. 아버지에게 작은 아이는 늘 계단을 오르내리며 들썩거렸던 터라 사람냄새를 풍기며 온 가족이 함께 사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북적거리며 살게 될 날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사실 요양사의 도움을 받을때도 여행이나 잠깐의 외출을 하려고 하면 아버지의 세끼 식사를 챙겨 드리는 일이 나에게는 가장 큰 숙제였다. 작은 아이가 가고 나니 ‘아이가 있을 때는 항상 집에 있었기에 기대는 마음이 있었다. 새삼 아이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웠었는지’를 깨달았었다.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감사함과 미안한 마음이 감아가고 있는 실뭉치처럼 갈수록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사서 하는 고생이라”고 남들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순간 순간 “그래도 잘했다”는 생각이 늘 든다.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어서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 갈 뿐이다. 커가는 어린 손주들과 같이 사는 것과는 달리 보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 참 많이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 못된 생각인지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며 구원의 기쁨을 늘 묵상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믿음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괴리감이 있는지를 늘 깨닫게 되는 것 처럼 말이다. 코로나19와 아버지는 내 인생의 새로운 획을 긋는 전환점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