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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
걸상
2020. 10. 27. 22:38
“이십분 후에 밥을 먹으러 내려 온다”는 작은 아이의 카톡을 받고 교회에서 부랴 부랴 집으로 왔다. 오늘 받아 온 안동 고기중 삼겹살에서 살 부분만 발라 낸 고기로 탕수육을 만들었다. 작은 아이가 “탕수육을 좋아하는 미식가로서 룽성의 탕수육보다 더 맛있다”는 한 마디에 요리로 인한 모든 피로가 날라가 버린 것만 같았다. 오후에 만든 매운 양념치킨 소스를 주었더니 소스도 맛있다며 탕수육 소스랑 먹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단다. 튀김 옷도 튀긴 상태도 좋았단다. 주중에 한번 더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탕수육을 또 만들어 달라고 하여 또 삼겹살 부분에서 살만을 발라내어 고기를 손가락 크기로 잘라서 만들어 주었다. 소스도 집에 있는 야채들을 넣어 만들었다. 노란색 파프리카, 양파, 사과, 당근, 레몬즙을 넣었더니 소스 색깔이 노랗게 나왔다. 소스도 정말 맛있다며 사먹는 것과 고기 맛이 확실히 다르단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상큼하다”고 평가를 해주었다. 웃으면서 농담으로 “같이 장사를 하자”고 말했다. 최고의 재료들로 먹기 바로 직전에 만들었으니 맛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기름도 포도씨유를 사용하여 다른 음식점에서 먹던 것과 다른 더 신선한 맛을 느껴졌을 것이다.
같이 사는 세 명의 남자 중 남편이 제일 무던하고 아들과 아버지는 정말 까다로운 편이다. 아버지는 선입견과 당신이 옛날에 잡수시던 그 조리법과 그 맛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시곤 한다. 작은 아이는 항상 단백질반찬을 원하니 각별하게 신경을 써 주어야한다. 사람에 따라 시간차로 끼니를 챙기니 시간 사용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음을 늘 절감한다. 밥을 차릴때 마다 나의 죄성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를 위해 밥을 차릴 때가 제일 즐겁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쩜 자연스럽게 우러난 마음이라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효”라는 것을 왜 그렇게 강조하여야만 했는지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우리를 방치 한다면 내 생애속에서 “효”는 존재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절로 우러나는 마음이 아니어서다. 작은 아이를 향해 우러나는 나의 마음도 영원할 수 없음을 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어 서로를 향해 배려하고 상대를 인정하며 조심스럽게 떠 받들어 주어야만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칼같은 가혹함이 아닌,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온전하고 평안의 길을 주시기 위한 배려이며 사랑의 약속임을 알기 때문이다.
탕수육을 또 만들어 달라고 하여 또 삼겹살 부분에서 살만을 발라내어 고기를 손가락 크기로 잘라서 만들어 주었다. 소스도 집에 있는 야채들을 넣어 만들었다. 노란색 파프리카, 양파, 사과, 당근, 레몬즙을 넣었더니 소스 색깔이 노랗게 나왔다. 소스도 정말 맛있다며 사먹는 것과 고기 맛이 확실히 다르단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상큼하다”고 평가를 해주었다. 웃으면서 농담으로 “같이 장사를 하자”고 말했다. 최고의 재료들로 먹기 바로 직전에 만들었으니 맛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기름도 포도씨유를 사용하여 다른 음식점에서 먹던 것과 다른 더 신선한 맛을 느껴졌을 것이다.
같이 사는 세 명의 남자 중 남편이 제일 무던하고 아들과 아버지는 정말 까다로운 편이다. 아버지는 선입견과 당신이 옛날에 잡수시던 그 조리법과 그 맛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시곤 한다. 작은 아이는 항상 단백질반찬을 원하니 각별하게 신경을 써 주어야한다. 사람에 따라 시간차로 끼니를 챙기니 시간 사용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음을 늘 절감한다. 밥을 차릴때 마다 나의 죄성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를 위해 밥을 차릴 때가 제일 즐겁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쩜 자연스럽게 우러난 마음이라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지만 “효”라는 것을 왜 그렇게 강조하여야만 했는지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음이 흘러가는대로 우리를 방치 한다면 내 생애속에서 “효”는 존재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저절로 우러나는 마음이 아니어서다. 작은 아이를 향해 우러나는 나의 마음도 영원할 수 없음을 안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적이어 서로를 향해 배려하고 상대를 인정하며 조심스럽게 떠 받들어 주어야만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칼같은 가혹함이 아닌,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온전하고 평안의 길을 주시기 위한 배려이며 사랑의 약속임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