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2019년 12월 31일이다. 입원하셨던 형부를 언니가 설득하여 퇴원을 시켰다. 다음 날이 쉬는 날이고 진전있는 치료보다는 결국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언니의 생일 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엄마의 요양원에 가기로 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내 개인적인 체감온도는 족히 영하 육칠도 정도라고 느껴졌다. 요양원으로 가는 길에 빵집 <궁전>에서 큰 언니의 케이크를 샀다.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도 조금 맛보여 드리고 싶어 작은 케이크도 샀다. 엄마와 아빠는 물리치료 중이라고 하였다. 한시간 정도 기다리라고 하여 엄마 방에서 한시간을 꼬박 기다려야만 했다. 같이 갔었던 여전도사님께서 “자식때문에 골머리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는 말은 맞아도 부모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셨다. 아마도 요양원에 계신 부모님이어서 그렇게 말하신 것 같다. 내가 힘들어 한달동안 못찾아가도 아무도 무엇이라 할사람이 없기때문이다. 히터를 켜기 바로 전이어서 그런지 살짝 춥다고 느껴졌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다 보니 히터가 들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곁에 계신 분이 잔기침을 몇번 정도를 하시더니 곧장 마스크를 찾아서 착용하시며 “당신이 히터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셨다”고 고백하였다. 엄마가 조금있다가 나오셨고 곧장 식탁으로 안내 되었는데 내가 찾아가 뵈니 얼마나 반가워하셨는지 모른다. 이빨을 가져다 드리려고 하니 아빠가 당신이 가져 오시겠단다. 내가 가겠다고 하니 미쳐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신 아버지께서 당신도 이빨을 착용해야 하니 당신이 가시겠단다. “아버지 저예요!”하니 “그래 멀리서 왔구나!”하신다. 결국 식사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 방으로 데려가 말씀을 나누라고 하여 방에 와서 언니를 낳으신 날이니 엄마도 케이크를 맛보라 하시니 “그래 큰딸 생일이지?”하셨다. 불행이도 티라미수를 사갔는데 첫부분이 쌉쌀한 초콜릿가루 부분이 맛없다시며 아버지께 드리라고 자꾸 손짓을 하셨다. 스푼이 두개여서 번갈아 맛있는 쪽은 엄마에게 드리면서 잡수시게 하여 드렸다. 엄마가 케이크를 하도 아빠에게 주라고 하여 전도사님께서 “아직도 남편 분을 챙기시네요?”하니 “당연한 것 아니예요?하셨다. 축 늘어져 계실때는 얼마 못사실 것만 같았는데 오늘은 얼마나 또렷하신지 “왜 꾸미지 않고 일꾼처럼 하고 왔냐?”하신다. ‘엄마에게는 여전히 미모가 중요하시구나!’ 싶었던 대화였다. “아이들은 잘 있냐?” “남서방은 방학을 했냐?”시며 궁금해 하셨다. 지난 토요일에 가려다가 요양원에 못간 언니가 사둔 쵸코 파이 두상자와 포도음료수 9개를 가지고 갔었다. 일하는 분들이 당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하여 “멀리서 딸이 왔는데 아무것도 못드리면 너무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니 그제서야 음료수 세개와 한상자는 드려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이버지 사물함에 넣어 두고 올 수 있었다. 이유 없이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결국 ‘나도 이 길을 가겠구나!’싶어 져서 그런 것 같다. 시간이 많지 않아 곧장 나와야 해서 “삼척에 가셔서 살 수 있겠냐?”고 여쭈니 “삼척이 살기 좋은 동네지!”하신다. 엄마는 “내 인생 이제 끝장이니 자식들이 하자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물리치료를 받으셔서 그런지 집에 계실때 보다는 훨씬 활기차 보이셔서 감사했다. 이젠 그 곳을 삶의 터전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당신들의 과제 앞에 잘 순응해 가시는 여정인 것 같았다. 다른 곳으로 심방을 가셨던 두명의 여전도사님께서 함께 오셔서 손을 잡고 기도를 해드렸는데 엄마가 큰 소리로 “아멘”을 반복하시는데 감사해서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사실 언니가 몸살로 아파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진료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아빠는 편두통이 너무 심해 죽을 것만 같으시다며 큰 언니에게 연락을 반복해서 주셨었다. 가족력과도 같은 편두통이 나이가 들수록 때로 얼마나 심하게 아픈지를 알기에 우리는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외로움으로 인한 몸부림처럼 여겨져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들이 생각나기도 하며 문득 시할머니의 생각이 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할머니도 요양원에 보내고 싶어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그때만 해도 차마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그 당시 우리집의 상황이 요양원보다 더 나았다고 할 순 없다.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뵐 수 밖에 없음을 알지만 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그 것 조차도 자신 할 수 없음을 알기에 늘 가슴이 아프다. 지나놓고 보면 부모님한테 잘해야 하는 이유들을 큰 언니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은 사실이다. 큰 언니가 부모님께 하는 것을 보며 그래야 하나 보다 하고 늘 따라하였던 것 같다. 언니네 집에 있으면서 언니와 같이 우족을 끓였었다. 언니는 아직도 언니네 집에 맛있는 것이 생기면 엄마네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생기곤 한단다. 한끼라도 맛있게 먹이고 싶어 하였던 수많은 시간들이 쌓여 지금까지 왔다.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고 싶어 하였었던 언니의 마음을 늘 느끼기에 여전히 언니는 나의 거울이 되어 준 것 같다. 시집을 오니 어머니께서 당신 친정은 단명한 집안인데 남씨집안은 장수 집안이라고 자랑을 하셨었다. 당연히 친정부모님이 훨씬 일찍 돌아가실 것이라고 만 생각을 하며 살았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오늘 요양원을 찾아 다니며 남편에게 하니 “엄마가 모르셔서 하신 말씀”이었단다.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는 인생인데 어찌 몇사람의 단명이나 장수를 일반화 할 수 있겠냐!”고 말해 주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나는 인생의 그 험한 굴곡을 내 것으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아버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어머니의 슬픔과 할머니의 절망, 남편의 고통을 절절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딸이어서 그런지 또 엄마 아빠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아프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결국 슬픔뿐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전에 방학인 남편과 요양원 두곳을 방문하여 상담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