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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

걸상 2018. 4. 30. 12:30

생각해 보면 이혼이라는 단어를 항상 머릿 속에 넣어둔 채 살았었던 것 같다.

잘 살고 있는 시집식구들 틈에 끼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나는 이방인 그 자체였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하였더라해도 누구나 결혼은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하게 되는 것 같다.

깊게 생각한다면 아무도 결혼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름 결혼에 대해 여자와 남자에 대해 가정과 세계관에 대해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많이 하였었도 이론과 실제는 다 다른 것임을 깨달았었다. 결혼은 두강이 만나는 포인트점과 같아서 물줄기가 부딪히기에 소리가 커지며 소용돌이가 생기고 서로 다투는 것이 당연하다는 책속의 글을 읽었지만 실제로 그 소용돌이속에서 버텨내기에 너무 순수했고 단련되지 못하였었다.

시집살이를 하니 지쳐갔었던 것 같다.

각자가 결혼이라는 오지에 처음 진입하는 것이어서 복병처럼 숨어 있는 것들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오지가 모든 사람에게 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최근 큰 아이의 또래들이 결혼 하는 것을 보며 나의 그 시절 그 심정을 적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없이 누구나 겪게 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신혼 초 내가 가졌었던 그 감정의 소용돌이를 기억해 내어 적어본다.

 

남편은 자신이 살던대로 살면 되는 것이어서 아무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올해로 만 이십팔년이 되었으니 남편과 나는 이제야 부모님의 영향력 아래에 더 이상 있지 않아도 될만큼 살은 느낌이다.

 

남편은 늘 엄마 편에서 엄마의 시각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말하곤 했었다.

가장 결정적인 말은 세상에서 우리 엄마를 나쁜 시어머니라고 말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이 나쁘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지...

너무 주관적이어서 질릴 정도였다.

나를 향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말이어서다.

당연한 것은 남편은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밥을 먹고 이십팔년간 살았으니 그에게는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남자에게 내가 최선을 다해야지만 내 생각이 먹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참 슬펐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우리집의 귀한 막내딸이었고 나도 나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처녀 총각이 믿음이 있는 것을 증명하는것은 시집을 가봐야 안다고들 하였다.

<시집에 파송된 선교사>라는 말도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무조건 날 판단하려는 것 같은 시선들을 감당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시간은 또 얼마나 느리게 가는지 하루 하루가 막막했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일상이 감시당하는 것 같았다.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길고 오랜기간이 필요한지 절감했었다.

 

이런 생각은 오로지 내 입장에서만 쓴 글이다.

 

결혼하면서 겪었던 소소한 갈등들이 아물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 틈에 자랐어서 눈치가 너무 빨라서 또 탈이기도 했다.

소심한 a형이었음에도 항상 눈치가 없는 사람인 것 같이 살았었던 것 같다. 시집식구들에 비하면 난 이방인이었고 숫자적으로 열세였다. 남편을 의지하여 시집에 와서 살고 있는데도 그 남편은 한순간도 내 편이 아닌 것 같았었다.

 

하지만 늘 긍정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었다.

신혼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넘 외로워 밤마다 일기를 써 대곤했었다.

 

상처되었었던 말들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난 주 설교 시간에 심부름으로 전장으로 오게 된 다윗에게 비난의 말을 퍼부었던 엘리압의 말이 결국 아무 힘이 없었음을 설명해 주셨었던 기억이 난다.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들에 있는 양들은 누구에게 맡겼느냐?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17:28)다윗이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니까?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하고(29절)다윗은 억울하였음에도 오히려 견고한 마음으로 그 상황을 바라 볼 수 있어서 주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을 하였고 하나님을 의지 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급박하고 긴장된 순간에 들어야만 했던 비수와도 같았던 무시와 비난앞에서 담담할 수 있었던 그였다.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련된 반응을 보였었던 어린 다윗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나에게 만큼은 하나님안에서 갖게된 견고한 자존감이 결혼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인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결혼을 실패하고 싶지 않았었다.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나보다도 더 많이 나의 가정이 온전하게 지켜지고 성숙되길 바라신다는 사실을 때닫곤 한다.

 

누가 뭐라 했다고 상대가 한 말 그대로 내가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물론 <배우자는 하나님이 맺어 주신다>는 대 전제를 믿고 의지 했다. 부모님의 말씀대로 인내로 견뎌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결국 우리는 둘 다 부모님을 떠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기에 남편은 몸이 못떠났었고 딸은 마음을 친정에 두고 간다고 하는데 나는 마음을 친정에 두고 와서 부모님을 떠나지 못했었던 것 같다. 큰 언니와 남동생이 둘 다 외국에 가서 살았었고 연로하신 부모님곁에 나밖에 없다는 마음이 항상 컸었다. 나는 부모님곁에 살면서 최선을 다해 지켜드리고 싶었었다. 결혼한 자녀를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도 독립시켜야 하는데 우리부부는 그렇지 못했었다.

 

모든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음을 늘 깨닫는다. 지켜야 할 가정과 사명이 내 앞에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인생사용설명서가 필요함을 느낀다. 우리 둘 다 신앙이 있어서 좋았었다.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었다면 변화도 없었을 것 같다.결혼해 보니 남편은 이미 게임등 놀이 문화를 장착하고 있어서 앞이 캄캄했었다. 남편은 말씀앞에서 또 자신의 질병앞에서 스스로를 더 귀하게 추수려갔다. 말씀과 예배가 없었다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감을 알기에 서로 자신이 옳다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사느라 관계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결혼은 진입장벽을 넘기보다 결혼하고 나서의 관계들이 얼마나 더 힘든지 알지 못하고 결혼을 했었던 것 같다.

부모님과 우리 가정이 따로 떨어져 살아도 힘이 드는데 한 집에 같이 살았으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세월을 보냈는가 싶다.부모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서 각자의 생각들을 조율할 기회가 없었다. 싸울 수도 없었다. 그냥 묻어가기만 했었다. 독립을 원하는 사춘기 아이들과도 같았다. 정서적으로 표출되지 못해 항상 불안한 어른아이였다. 언제 끝날지도 몰랐었던 것이 또 나를 힘들게 했었다. 어차피 아이들을 키우면 갇혀 사는게 당연한데도 나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어느 것 하나 선택권이 없었고 밖에 나가는 것도 자유롭지 못해 늘 갇힌 느낌이 컸다. 가장 편한 곳이 집이어야 했는데 내겐 가장 불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속에 늘 있었음을 깨닫는다.

내게 힘들어 하던 그 곳에 주님이 와 주셨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게 하셨는지 모른다.

부모님이셨기에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다 덮어 주셨다.

결국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믿지 않으셨지만 신앙인이셨었던 우리 부모님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신 분들이셨음을 알아갔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며 왕같은 제사장이셨다.

어째튼 나는 선교사가 맞았다.

나는 힘들어하면서 함께 일상을 같이 한 것 밖에 없지만 말이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차츰 익숙해져 갔고 나를 무조건 사랑해주시는 또 새로운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까지도우리를 위해 늘 기도해주시는 든든한 기도의 여장부시다.

고모네와 동서네는 여전히 우리의 기도 제목속에 살아 있어서 기쁨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잘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가족이다.